나의 인생 이야기 1편

저는 어렸을때 혁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17살때였던가 하루는 버스에 올라 탔는데, 한산한 버스 한가운데 흰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산신령 처럼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노인이 저한테
"자네는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가?" 
했습니다. 저는 거침없이 
"혁명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우리나라에 혁명가는 너무 많다네. 기술자가 되는것도 애국하는 길이니 한번 잘 생각해 보게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집에 와서도 좀처럼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었습니다.

진로를 결정하기 위해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분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하나같이 정치, 혁명가 이런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습니다. 유신독재 치하에서 혁명가가 되겠다니? "너 미쳤니?"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고민하고 있는데 자꾸 그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리고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여러사람 말 듣고 안전한 길로 가자. 일단 기술자가 되면 선진외국에 기술 배우러 나갈일 많을테이니 나가서 기술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선진문물을 많이 배워서, 인생 후반부에 내가 꿈 꿨던 한국사회를 진보시키는 일을 해 보자꾸나."

이렇게 대략적인 인생 청사진을 그리고 진로를 바꿨는데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에는 역사, 사회과목에 치중해서 공부했었는데 갑자기 수학, 과학쪽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어렵사리 공대전자과, 대학원 물리과를 마치고 엔지니어가 되었습니다.

첫직장은 미국계 반도체 회사였는데 모든 업무를 영어로 하고 미국 엔지니어들과의 접촉도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영어, 서구적 업무스타일이 몸에 베었습니다. 두번째 직장은 한국일보사 전산실이었는데 국내 최초 신문제작 전산화 프로젝트가 있어 영국에 가서 한달간 신기술을 배워와야 했습니다. 난생 처음 비행기에 외국 나들이에 보는것 마다 신기하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세번째 직장은 한국회사, 네번째 회사는 독일계 대기업으로 독일에 가서 2년정도 근무해야 하는게 조건이었습니다. 세계 자동차부품업계를 선도하는 BOSCH라는 회사에가서 그야말로 최첨단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보다 더 나를 기쁘게 했던것은 철두철미한 독일식 업무방식, 생활태도, 가치관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사회주의 복지제도 이런것들 이었습니다.

2년여의 독일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이러한 것들을 취합해 책을 하나 썼습니다. "아우토 반 - 어느 엔지니어의 독일체험기" 였습니다. 어떤지인이 독일어로도 번역해 주어 독일 사람들도 많이 읽어 주었는데 모두들 좋아하는것을 보았습니다. 독일 BOSCH 본사에서는 그룹사보에 소개시켜주고 독일에서 한국지사로 파견나가거나 출장가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사람들을 계몽할 목적으로 책을 썼는데 역으로 독일사람들한테는 한국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정치역량을 시험해 보려고, 노조위원장에 출마하여 노조위원장이 되고 그전까지의 투쟁일관도의 노조운영방식에서 Negotiation 중심의 Win Win 전략을 도모하였습니다. 다행히 노사 모두 만족하는 분위기였고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독일회사에서는 노조위원장을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사업파트너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노조운영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직원의 자녀가 대학에 가게되면 회사가 등록금의 반을 주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대학등록금이 무료니까 독일인들을 설득하는데 용이했습니다. 사장은 제가 쓴 책을 전 직원수만큼 구입하여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다섯번째 직장은 프리랜서 성격의 컨설턴트였는데 새장안에 갇혀서 꼬박꼬박 봉급을 타먹는것보다 지접 날아서 먹이를 스스로 찾아 먹어보고 싶었었습니다. 그때 마침 Y2K라고 컴퓨터 2자리연도표기방식이 2000년이 되면서 문제가되는 이슈가 있었습니다. 그당시 IMF를 맞아 한국은 경제가 아주 어려운 시기였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외국의 컴퓨터나 대형 자동화기기 업체들은 이를 빌미로 한국정부나 업체들에 바가지를 씌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즉 해결책이 있는데도 가려쳐주지 않고 "우리도 모른다. 안전하고 싶으면 새기계로 바꿔라."하고 겁을 주고 있었습니다. 상하수도 처리장같이 대규모 설비가 들어가는 곳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므로 공무원들은 면책을 하려고 너도 나도 예산을 책정해 새 기계로 바꿀 계획들을 수립해 놓고 있었습니다. 엔지니어적 직감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느낀 저는 테스트를 하여 별거 아니다라는것을 증명하고 년도를 임의로 4년전으로 돌리고 프린트때는 다시 4년 더하는 방식을 전국에 확대시켜, 1999년3월1일자 한국일보사 지면에 "한 컨설턴트, 회년기법으로 전국 상하수처리장 Y2K예산 100억 절감하다"라고 게재해 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프로젝트는 예산을 책정해 놓지 못했다하여 시범케이스로 컨설팅비를 받지 않기로 했기때문에 한푼도 못받았지만 힛트를 치는 바람에 유명 컨설턴트가 되어 한9개월간 전국 각지에 불려다니며 즐거운 비명을 올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삼성같은 대기업은 7일간 컨설팅에 하루일당이 100만원씩이었으니까 괜찮은 수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보람있었던것은 첫 프로젝트에서 정부예산 100억을 절감시켜주었던 것인데, 어렸을때 노인이 "기술자가 되는것도 애국하는길이다"라는 말이 맞아떨어진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ISO9000 심사기법을 응용한 Y2K인증제도를 개발한 후 정보통신부에 건의하여 실현시키고, IMF로 인해 발생한 IT업계 실직자들을 전원 구제하고 더 나아가 외국컨설팅업체들이 발 못 붇히게하고 한국안에서 IT업계를 활성화시켰었습니다.
2000년1월1일 D-Day가 임박해서는 청와대의 부름을 받아 Y2K국가점검반을 구성하여 최고위급 국가기관들과 각군 컴퓨터장비들의 Y2K대비 상태들을 점검하여 D-Day가 되더라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점검하였습니다.
정보통신부에 인터넷바람을 불어넣어 한국이 인터넷강국이 되는 토대를 마련하였고, 국방부에는 사이버테러에 대비한 특수부대를 창설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이정도면 나도 한국에 할 말큼 했다라고 생각하고 44세되는 2000년에 저는 가족을 데리고 미지의 세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됩니다.

2020년 4월30일
토론토 자유의 기수

(후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