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이야기 4편

나의 인생 이야기 4편

유튜브에서 말씀 드린 대로 어렵게, 어렵게 취직을 해서 Queen's University 에서 연구보조 엔지니어로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꿈같은 나날이었습니다. 과학기술자로서 연구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정치도 잊고, 세상 뉴스도 안보고 오직 연구에만 전념합니다. 하나, 하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창의력을 가미해 뭔가를 창조해 냅니다.

봉급은 작지만 대학이라 복지도 좋고 출퇴근 시간도 없습니다. 뭘 하다가 잘 안되면 좀 덮어 놓고 아름다운 온타리오 호수가에 가서 머리도 좀 식히곤 했습니다.

구직활동 할 때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같이 가게 하는 게 상책" 이라고 뜯어 말리던 한국아자씨도
"아! 이제는 얼굴이 좀 펴 보이는 구먼..." 하시면서 좋아 하십니다.

그런데, 연구소에 몇 년 먼저와 터 잡고 있는 중국 아이는 텃세를 부립니다. 이 연구소가 캐나다에서는 첫 직장인데 그후 직장에서도 중국아이들은 언제나 골칫거리였습니다.

먼저 온 아이들은 내가 백인들에게 인정을 받을까봐 시샘을 하고 나중에 온 아이들은 약삭빠르게 내 기술을 베껴 자기걸로 만듭니다. 아주 얄미운 존재였습니다.

이는 작은 나 하나만의 문제였지만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에게는 중국이 아주 골치 아픈 존재가 될 것 이라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저는 세계 최고 자동차부품업체 BOSCH에서 그것도 독일본사 기술연구소에서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캐나다의 기술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독일에서 익힌 기술을 캐나다에 와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한국에서는 그 기술을 써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구는 뒷전이고 한국인 상사들은 각자 패거리를 만들어 싸우기 바빴습니다.

사원들은 눈치를 보고 줄서기에 바쁘고 회사 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쪽은 짐 싸서 나가야하고... 내가 경험한 한국에서의 회사들은 대부분 그랬습니다. 아마도 한국인들에게는 당파싸움의 유전자가 흐르나 봅니다.

퀸스대학 부속연구소나 그 후 다른 캐나다회사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유독 한국 사람들만 모이면 패를 갈라 경쟁하고 싸웁니다.
어찌 보면 그게 한국의 기적적 성장의 모티브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독일에서 배운 기술을 응용해 측정 장치를 개발했고 그 덕분에 우리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저렴한 비용으로, 플라스틱을 열이 아닌 진동만으로 용접할 때, 용접 계면의 온도를 측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03년 미국 Plastic Engineer's Association 학회에 가서 발표 할 때

"올해의 최우수논문상"

을 수상하는 영예가 주어졌습니다.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독일기술을 탐내는 곳은 또 있었습니다. 토론토옆 미시사가에 있는 한 캐나다회사로 부터 제안이 왔습니다. 봉급을 두배로 주고 Senior Scientist 타이틀을 줄테니 와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나는 돈 보다도 아름다운 킹스턴에 더 살고 싶었지만 킹스턴의 연구소에서는 더 이상의 프로젝트가 없다고해서 할 수 없이 그 회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새 회사에서 많은 일을 또 해 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역시 회사였습니다. 대학연구소와는 달랐습니다. 회사는 이윤을 내야했고 순수연구보다 그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타이트한 조직생활이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꾸 새론운 곳에 도전을 했습니다.
킹스턴에 있을 때는 저녁때 Toaster's Masters Club 이라는 영어연설클럽에 가 열심히 영어로 연설하는 기법을 배웠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정치가가되면 국제무대에서 영어로 연설을 하여야 할 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의 연설기법은 한국의 웅변식 연설이 아니라 절제되고 품위 있는, 초장에는 일단 유머로 좌중을 웃기고 시작하는, 그런 격조 있는 기법이었습니다. 영어를 증진하는 면도 있었으나 저는 오랜 전통의 이런 문화를 배우는 것이 기뻤습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또는 청문회를 할 때, 위압 스런, 아니면 고집을 피우는 그래서 반대파는 일어나서 고성을 지르는 그런 모습의 연설이 아니라, 반대파에 대해서도 예의 바르고, 초장에는 유머로 다함께 한바탕 웃고 시작하는, 그런 품격 있는 정치문화로

"내가 이다음에 한국에 가면 바꿔 놓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킹스턴 있을때 한국학생들 홈스테이를 하고 가디언(미성년 학생들에 대한 법적 대리보호자 역할)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좋아하고 돌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성심성의껏 해주고 저 또한 즐거워 습니다.

하루는 학교에 찾아갔는데 7학년 영어시간에 유머에 대한 과제를 내주고 각자 나와서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유머를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유머와 함께 사는지를...

킹스턴에 살 때의 얘긴데,
어느 눈이 많이 오는 겨울날, 한 남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30분을 지체해서야 버스가 도착했는데:

남자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껄껄 웃으며 운전사와 유머를 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아저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하고 타박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또, 한번은 길에서 두 차량이 길에서 접촉사고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처럼 두 운전자가 나와서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하면서 실랑이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왠걸?

껄껄 웃으며 유머를 하는 게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토론토 같은 대도시가 아니고 인구 10만정도의 작은 도시에서의 일이지만, 이게 캐나다문화의 근간이었습니다. 유모어는 크게는 국회에서 작게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온갖 종류의 갈등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해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다음에 한국에 돌아가면 청소년 교과과정에 캐나다처럼 "유머" 과정을 꼭 넣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미시사가에 있을때는 저녁과 주말에 가까운 컬리지에 가서 저로서는 새로운 영역 Accounting, Business Law, Financing 과목들을 배웠습니다.

Accounting을 배우기 시작할 때 일화가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느 한국가정처럼 와이프가 가계재정을 관리했습니다. 내가 Accounting을 좀 배워야겠다고 하니까:

"엔지니어가 Accounting(회계)을 왜 배우시나?" 

고 하면서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없이, 회사에 가서 직원자질향상 차원에서 수업료 좀 지원해 줄 수 없냐고 했더니, 엔지니어링 관련 과목이라면 해 줄 수 있는데 분야가 틀려서 안돼겠다는 것 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풀이 죽어서 3번째 강의 끝나고(세 번째 까지는 무료로 들을 수 있으므로) 강사에게 아쉽게 됬다고... 다음부터는 못나오게 됬다고... 하니까:

"돈 때문에 그러냐?"

고 하시면서

"만약 그렇다면 내가 눈감아 줄터이니 시험 치지 말고 학교가 눈치 채지 않게 그냥 들어라."

고 하셨습니다. 나는 화색이 돌면서,

"Thank you. Thank you."

했습니다.

독일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인데 캐나다라서 가능 했던 것 같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두드리면 열리나 봅니다.

2020년 5월5일
토론토 자유의 기수

(5편에 계속)